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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유전체(게놈) 속에 수억 년 동안 숨겨져 있던 ‘진화의 설계도’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 세계 유전학자들로 구성된 국제 공동 연구팀은 그동안 과학계에서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식물의 비부호화 DNA(Non-coding DNA) 분석을 통해, 약 3억 년에 걸친 식물 진화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 최신호에 게재되며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연구의 핵심은 식물 유전체 내에서 단백질을 직접 생성하지는 않지만, 유전자의 활성화 시점과 방식을 결정하는 ‘유전자 스위치’를 찾아낸 것에 있다. 연구팀은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CSHL), 케임브리지 대학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등이 공동 개발한 알고리즘인 ‘컨서버토리(Conservatory)’를 활용했다.
이 인공지능 기반 플랫폼은 이끼류부터 현대의 꽃식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종의 유전체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약 3억 년 전 꽃식물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보존되어 온 '230만 개의 보존된 비부호화 서열(CNS)'을 식별해냈다. 이는 식물이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유전 정보를 얼마나 철저하게 보호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과거 과학계는 식물의 진화사를 추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다. 식물의 게놈은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복제와 재배열을 거치며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그러한 혼돈 속에서도 특정 영역이 수억 년간 ‘정지 화면’처럼 유지되어 왔음을 입증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러한 ‘규제 서열’들의 위치다. 연구팀에 따르면, 식별된 서열의 약 4분의 1은 자신이 조절하는 유전자로부터 25킬로베이스(kb) 이상 떨어진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심지어 중간에 있는 다른 유전자들을 건너뛰어 특정 유전자에만 영향을 미치는 원격 제어 방식도 확인되었다. 이는 기존의 유전자 분석 방식이 놓치고 있었던 유전체 작동 원리의 사각지대를 밝혀낸 쾌거로 평가받는다.
연구진은 이번 발견의 중요성을 검증하기 위해 식물 발달의 핵심 유전자인 ‘우쉘(WUSCHEL)’을 집중 분석했다. 우쉘은 식물의 줄기세포 유지와 성장을 담당하는 필수 유전자다. 분석 결과, 이 유전자를 조절하는 특정 요소들은 3억 년 이상의 세월 동안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식물이 육상에 적응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인 성장 메커니즘은 결코 타협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보는 오늘날의 거대한 나무와 화려한 꽃들도 3억 년 전 조상이 사용하던 ‘마스터 스위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연구는 단순한 학술적 발견을 넘어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농작물 유전자 교정은 주로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자체’를 수정하는 데 집중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유전자 스위치’ 지도를 활용하면 훨씬 정교한 유전공학적 접근이 가능해진다.
식물의 성장 속도, 가뭄 저항성, 생산량 등을 결정하는 ‘조절 장치’를 미세하게 조정함으로써, 식물 본연의 생리 구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형질만을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기후 위기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차세대 ‘슈퍼 작물’ 개발의 핵심 열쇠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 유전학계에서 기능이 명확하지 않아 ‘정크(Junk) DNA’로 불리기도 했던 비부호화 영역은 이번 연구를 통해 식물 생태계의 진정한 ‘지휘자’였음이 증명되었다.
연구팀은 “식물의 게놈은 여전히 거대한 비밀 창고와 같다”며, “보존된 비부호화 서열을 이해하는 것은 식물의 과거를 읽는 것인 동시에, 인류가 직면한 농업적 과제를 해결할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3억 년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식물의 지혜가 이제 현대 과학의 손에 들려 새로운 진화를 예고하고 있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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